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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다논, 그릭 무라벨 출시…환경을 생각한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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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궉채한 작성일21-06-27 09:58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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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수정 기자 = 국내 ESG 경영을 선도하고 있는 풀무원의 요거트 전문 기업 풀무원다논이 국내 그릭요거트 판매 1위 ‘풀무원다논 그릭’을 무라벨 제품으로 25일 출시했다. 그릭 정통 유산균으로 깊은 풍미와 풍부한 식감을 제공하는 그릭요거트는 무라벨 출시로 맛과 함께 분리수거의 간편성까지 갖췄다. (풀무원다논 제공) 2021.6.25/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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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재 고개로 곧바로 가파르게 이어지고 오봉저수지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길게 옛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에 걸어서 넘었던 아침재의 고갯길은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자동차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며 역사와 설화를 찾는다. ▲ 아침재 경로 추정 등산로의 지도에서 옛 아침재 고갯길의 경로를 추정해본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 부대가 이 고갯길을 넘었다고 한다.ⓒ 이완우 고려 말 1380년 9월에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에 승리한 이성계 장군의 군대가 개선 길에 지사면 관기리 장군바위 터에서 하룻밤을 숙영하였다고 한다. 아침에 고개를 넘어 팔공산 도선암(성수산 상이암)을 찾아가게 되어서 이 고개를 아침재라고 한다. 이성계 장군은 팔공산 도선암에서 기도를 하고 진안 마이산을 거쳐 전주의 오목대에서 승전 기념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성계 장군의 남원 황산 전투에서 전주 오목대의 이야기까지에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촘촘히 짜여 있다. 이성계 장군의 개선 길 곳곳에는 햇볕 아래 전해지는 오랜 역사가 있고, 백성들의 소망과 염원을 품은 달빛에 젖은 설화가 있다. 귀족들의 수탈에 시달리고, 잦은 전란에 지친 고려의 백성들은 평화로운 새 세상이 되기를 염원했다. 산신이든 미륵이든 이 세상을 구해주기를 소망하는 백성들에게 이성계 장군은 떠오르는 희망이었다. 임실 아침재 고갯마루를 넘다 ▲ 아침재 원경 지사면 관기리 장군바위 터에서 아침재를 바라본다. 자동차 도로를 개설하며 고갯마루를 절개한 형태가 뚜렷하다. 앞에 보이는 농로는 아침재 도로와는 관련이 없다.ⓒ 이완우 아침재 고갯마루는 자동차 도로와 등산로가 열십자로 교차하고 있다. 이곳 등산로에 있는 안내판의 지도가 이 지역의 산과 도로를 잘 표시해주고 있어서 옛 아침재 고갯길의 경로를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침재 도로 고갯마루에는 화강암 바위가 절개되어 가파른 바위 옹벽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 걸어 넘던 고개는 흔적이 없어져서,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걸으며 역사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 아침재 고갯마루 도로 아침재 도로 고갯마루의 화강암 바위가 절개되어 가파른 바위 옹벽을 이루고 있다.ⓒ 이완우이성계 장군은 남원에서 임실 지역으로 이동하여 팔공산 도선암을 거쳐 진안 마이산을 찾았고, 전주의 오목대에서 승전 기념잔치를 베풀 때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대풍가는 중국의 한 고조 유방이 황제가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할 때에 자신의 자부심을 밝힌 시가(詩歌)로 전해진다. 큰바람 일어나고 구름이 날렸다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다.어떻게 하면 용감한 병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는 1380년 황산 전투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고, 개선 길에 이성계 장군의 부대를 따라 귀경한 것으로 보인다. 오목대 승전잔치에 참석했던 정몽주는 이성계 장군이 읊은 이 노래의 의미를 짐작하고, 말을 달려 전주천을 건너고 남고산으로 달려가서 고려의 수도 개경 쪽을 바라보며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전주 남고산성의 만경대에는 정몽주의 우국시로 알려진 암각서가 있다. 저수지에 잠겨 있는 옛길을 생각한다  ▲ 왕방 저수지 옛날에 걷던 아침재 고갯길의 끝자락이 저수지에 잠겨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의 부대가 이 길을 따라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완우 아침재를 넘어서 성수면 방향으로 내려오면 현대 수리 시설인 왕방 저수지가 있다. 옛날에 걸었던 아침재 고갯길의 끝은 왕방 저수지에 잠겨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의 부대가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가며 걸었을 저수지 속에 잠겨있는 옛길을 상상해 본다. 1389년 10월에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정몽주와 변안열 장군을 초대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와 화답(和答)한 <하여가>와 <단심가>는 유명하다. 이방원은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정몽주가 가담할 뜻이 있는지 시조로써 마음을 떠보았다. 이방원은 고려의 수도인 송도 인근에 있는 만수산의 칡넝쿨에 빗대어, 우리 함께 새 나라를 건설하여 백 년을 함께 누리는 것이 어떠냐고 은유하여 완곡하게 물었다. 이에 정몽주는 이 몸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임에 대한 일편단심을 변할 수가 없다며 직설적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다짐하였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를 화답하는 자리에 변안열 장군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정몽주가 <단심가>로 응답한 후에, 변안열 장군은 <불굴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마주 꿰어,앞뒤로 끌로 당겨 감기고 쏠릴망정,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변안열 장군의 〈불굴가〉다. 1380년 9월 왜구가 남원 인월역(引月驛) 인근에 주둔하면서 북상하겠다고 하여 고려 조정은 긴장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 변안열 장군을 정1품인 도체찰사에, 이성계 장군을 정2품인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장수 8명을 원수로 정하여 왜구 토벌군을 편성하여 급히 파견하였다. 직급이 두 단계가 높은 변안열 장군이 황산 전투에 진군한 고려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황산 전투에서는 여러 장수가 지역을 분담하여 전투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역사서에는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 장군이 중심이고 독보적인 전공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합리화하는 용비어천(龍飛於天)의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이성계 장군의 열전은 없다.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개국한 국왕이 되었는데, 조선 시대 초기에 편찬한 고려사 역사서에 고려의 신하 장수로서 열전에 기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사는 이성계 장군의 황산 전투 전공을 변안열 장군 열전에 기술하였다.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최영 장군은 1388년 위화도회군 직후에, 변안열 장군은 우왕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1390년에 새 왕조를 지향하는 세력에 의해 제거된다. 이성계 장군이 새로운 아침을 열며 넘었던 아침재에서, 고려의 패망과 함께 행적이 지워진 고려의 충신 변안열 장군의 역사적 사실과 <불굴가>를 새롭게 살펴본다. 한적한 임실 태조로에서 대라(大螺) 소리를 듣다 임실 아침재 가까운 지역에는 관기리, 아침재, 조치 마을, 왕방리, 수천리 등 고려 말 이성계 장군과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아침에 재를 넘어서 아침재, 왕이 될 분이 방문한 곳이어서 왕방리, '남원 황산에서 수천 리나 온 듯하다'해서 수천리라고 했다. 조치 마을에서 왕방 저수지 옆의 도로를 따라 수천리까지 농어촌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도로 명칭이 태조로(太祖路)다. 이성계 장군이 이 길을 거쳐 팔공산 도선암에서 기도하고 조선을 건국하였기에 이 도로를 태조로라고 하였다. 한적한 임실 태조로에서 역사의 대라(大螺) 소리를 듣는다. 이성계 장군은 역사적으로 출중한 무장이었다.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사병인 2,000명 규모의 가별초는 고려인 여진인 몽골인 등 다국적 정예 기병 부대였다. 이 가별초는 몽골군, 몽골 군벌 군대, 여진족, 왜구, 홍건적 등과 싸워 연전연승하며 실전 전력을 키워온 불패의 군대였다. 가별초는 약 200년 동안 동북면 지역을 중심 무대로 하여 이성계 장군 가문에서 무력을 연마하고 전술에 통달한 충성심 강한 부대였다. 가별초 부대는 대라(큰 소라)를 불며 적진에 돌격하였다. 가별초의 크고 묵직한 대라 소리는 아군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적군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을 주었다. 이 대라 소리에 백성들은 안도하고, 왜구 여진족 홍건적들은 놀라서 전투 의지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 장군이 돋보이는 활약으로 왜구의 주력 부대장 아지발도를 제압하고 승기를 잡았으며, 가별초의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승전한 공로는 크다. 그러나 황산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을 여러 장수와 군사들의 협동 작전과 활약은 조선 시대 이후 역사의 기술에서 거의 생략되어 있다. 아침재에서 역사와 설화가 만나는 점을 찾으며 걷는다. 역사에는 승자와 기득권 계층의 입장이 반영되기 쉽고, 설화는 백성들이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아침재를 걸으며 고려 말의 과도기에서 역사의 씨줄과 설화의 날줄을 이야기해 본다. 임실의 아침재는 이성계 장군이 고려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왕조를 꿈꾸며 새 역사의 아침을 여는 고개가 되었다. 이성계 장군의 부대가 걸어서 넘던 옛날의 아침재가 흔적이 없어졌지만, 하지(夏至) 절기 6월의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며 역사와 설화는 당당하게 전해져 온다. 역사는 구름이 되어 고개를 넘고 있으며, 설화는 바람이 되어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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