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훼손된 돈대... 볼 것도 없는데 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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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궉채한 작성일22-08-28 09:44 조회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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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를 찾아가는 길 19] 인천 강화군 길상면 후애돈대, 택지돈대, 동검북돈대를 찾아서'강화나들길'을 즐겨 걷던 시절이 있었다. 나들길이 생겼던 그해(2011년)부터 근 5년간 참 많이도 걸었다. 매주 2회 정도 걸었으니 내가 걸은 거리를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 덕분에 강화도는 눈 감고도 다 알 것 같다.'강화나들길'은 모두 20개의 코스가 있다. 강화도와 부속 도서인 석모도, 교동도, 볼음도, 주문도까지 아우르는 나들길은 강화의 역사와 문화, 생태, 환경 등을 다 담은 알차고도 아름다운 길이다.'강화나들길', 역사와 함께 걷는 길그 중 강화 남단의 바닷가를 따라가는 8코스는 총 길이 17.2km로 초지진에서 출발해서 분오리돈대까지 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걷노라면 드넓은 갯벌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광과 바다가 품어온 생명에 경외감이 솟는다. 눈, 코, 입이 한꺼번에 호사하는 아름다운 해안가 길로 '철새 보러 가는 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8코스는 강화도 갯벌에 날아오는 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 강화 남쪽 바다를 경계했던 후애돈대ⓒ 문화재청
▲ 성벽과 그 위의 여장까지 다 복원한 후애돈대ⓒ 이승숙 8코스에서는 철새 외에도 또 다른 것도 만날 수 있으니 돈대가 바로 그것이다. 출발지인 초지진의 초지돈대를 비롯해서, 후애돈대, 그리고 도착점인 분오리돈대까지 모두 3개의 돈대가 8코스에 있다. 이 외에도 몇 개의 돈대가 더 있으니 섬암돈대와 택지돈대, 그리고 동검북돈대가 8코스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어 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길 기다린다. 강화도 54개 돈대를 모두 찾아가보기로 하고 지난 2월부터 돈대기행을 하고 있는 우리는 나들길 8코스에 있는 후애돈대와 택지돈대를 보러 갔다. 길상면 선두4리의 어판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후애돈대를 찾아나섰다.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후애돈대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바닷가에 있다. 다른 돈대들이 대부분 바다 쪽으로 튀어 나온 곶(串)이나 구릉의 꼭대기에 있는 것과 달리 후애돈대는 바닷가의 평탄지에 위치해 있다. 돈대가 사방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후애돈대는 그 목적에 일면 상통하지 않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강화 남단의 바닷가는 갯벌이 드넓게 형성되어 있어 침입자가 바다 쪽으로 해서 들어오기에는 불리한 지형이다. 이러한 까닭에 평탄지에 돈대를 축조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돈대와 돈대 사이를 연결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하려는 의도로 양암돈대와 택지돈대 사이에 후애돈대를 축조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후애돈대는 '선두보'의 관할 아래 있었다. 선두보는 강화의 12진보(鎭堡) 중의 하나로 후애돈대, 택지돈대, 양암돈대, 갈곶돈대를 관할하였다. 돈대와 돈대 사이를 연결할 목적으로 쌓았을 후애돈대는 남쪽의 동검북돈대까지 1750보(2.1km), 북쪽의 양암돈대까지는 1450보(1.7km) 떨어져 있다.
▲ 후애돈대 위치도ⓒ 이승숙
▲ 인천유형문화재 제33호인 후애돈대ⓒ 이승숙
▲ 후애돈대 성벽 위 여장 사이로 내다본 강화 앞 바다와 갯벌ⓒ 이승숙 한 변의 길이가 약 32m, 둘레는 129m인 정사각형 모양의 후애돈대는 인천유형문화재 33호이다. 1999년 육군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복원 이전까지 성벽 기단과 여장 일부 그리고 성벽에 오르도록 만들어놓은 계단 일부가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후애돈대는 1995년에 부분 보수를 하였고 1998년에 복원하여 흐터러짐없이 깔끔하고 반듯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벽과 여장까지 다 복원하였으니 원래의 상태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복원한 후애돈대 후애돈대를 둘러보고 택지돈대를 향해 간다. 강화나들길 8코스를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도 택지돈대는 처음이다. 여기 이 언덕에 돈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돈대에 관심을 두자 돈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택지돈대는 동검도가 마주보이는 곶(串)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토축을 기준으로 확인한 결과 동서 30m, 남북 21m, 둘레 103m로 추정되는 네모 모양의 돈대다. 1918년에 작성한 강화도 지형도에는 택지돈대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로 봤을 때 그 당시에 이미 돈대가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육군박물관에서 조사했을 때 토축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땅을 파보면 기단석의 토대가 길게 늘어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 택지돈대는 동검도가 마주보이는 선두리의 바닷가 언덕에 있다.ⓒ 이승숙 후애돈대에서 택지돈대까지 오는 길은 바닷가의 둑길이라 나무가 없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는다. 돈대가 좋아 돈대순례를 하지만 이 땡볕은 피하고 싶다. 그러던 참에 숲이 무성한 언덕이 보였다. 택지돈대가 있는 바로 그 언덕이다.아, 이곳에 돈대가 있을 줄이야... 나들길 8코스는 동검도가 건너다보이는 이 언덕 아래 오솔길을 거쳐간다. 그동안 숱하게 이곳을 지나갔으면서도 돈대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 숲 속 오솔길을 따라가자 나무들에 둘러쌓인 빈 터가 나왔다. 밭으로 이용되었을 법한 크기의 빈 터였다. 돌 무더기들이 좀 있었지만 돈대였을 거라 짐작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단석은 물론이고 성벽 돌처럼 보이는 가공된 돌도 보이지 않았다. 택지돈대의 석재들도 제방을 쌓는데 다 이용되었을까. 둘레가 100m도 넘고 성벽 높이 역시 꽤 되었을 돈대였을 테니 들어간 석재도 많았을 것이다. 5톤 트럭으로 수십 대, 아니 어쩌면 백 대 분량의 돌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그 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 걸까.
▲ 택지돈대는 둘레 103m, 동서 30m, 남북 21m 규모로 추정된다.ⓒ 이승숙 강화의 평야는 대부분 간척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닷가에 둑을 쌓아 갯벌을 육지로 만들었다. 제방을 쌓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했을까. 그럴 때 근처에 있는 폐돈대들의 성벽 돌을 반출해서 사용했을 것이다.택지돈대의 돌들도 역시 그렇게 쓰였을 것이다. 인근에 민가도 없어 사람의 손을 탈 일도 없는데, 그 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겠는가. 바닷가 물막이 공사를 할 때 가져다 썼을 것이다. 숲 모기떼와 조선시대 병사들철저히 파괴되고 훼손된 돈대였다. 군데군데 돌무더기들이 있었지만 별 소용 없을 것 같은 잡석들 뿐이었다. 볼 것도 없는 돈대에 뭐 하러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폐허까지도 돈대가 지닌 역사다. 빈 터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물을 마시며 간식거리들을 풀어놓는데 대부대가 출동했다. 이게 왠 잔치냐는 듯 숲 모기들이 떼로 나타나 사정없이 침을 꽂는다. 아이쿠, 모기한테 당할 자가 누가 있으랴. 우리는 허둥지둥 후퇴했다. 택지돈대에서 번을 서며 바다를 감시하던 조선시대 병사들도 우리처럼 모기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모기를 쫒았을까. 우리처럼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삼 그 옛날 병사들의 고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강화군 길상면 동검도 산 정상에 위치한 동검북돈대ⓒ 이승숙
▲ 동검북돈대는 강화도 54개 돈대 중 가장 크다. 보통 돈대의 3배 크기다.ⓒ 황평우 후애돈대와 택지돈대를 둘러 보았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내친 김에 동검도에 있는 돈대를 보러 나섰다. 코 앞에 동검도를 두고 어찌 그냥 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씩씩하게 동검도로 건너갔다.동검도는 강화도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이라고 했지만 오래 전에 다리가 놓여 강화도와 한 몸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검도(東檢島)는 강화의 동쪽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검문하던 섬이다. 그러니 사실상 동검도에서 부터 강화도가 시작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강화의 동쪽 검문소, 동검도동검도에도 돈대가 있다. 동검북돈대(東檢北墩臺)가 그것이다. 동검북돈대는 강화의 54개 돈대 중 가장 큰 돈대로 일반 돈대의 3배 규모에 달한다. 18세기 이전의 강화를 그린 옛 지도에는 동검북돈대가 돈대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지도에는 봉돈(烽墩) 또는 망대(望臺)로 표기되어 있다. 동검북돈대는 바닷가에 있지 않고 산 정상에 있다. 구형 대포의 사정거리가 바다까지 미치지 못하는 거리다. 돈대가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목적이라면 동검북돈대는 그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 동검북돈대 터에는 이런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다.ⓒ 황평우 돈대의 성벽 돌도 가공이 되지 않은 돌을 일정한 기준 없이 막 쌓은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돈대 성돌이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서 쓴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특징을 볼 때 동검북돈대는 돈대로서의 기능보다는 봉화대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검북돈대 안에는 봉화대도 있는 걸로 봐서 이러한 추정을 할 수 있다. 동검북돈대를 찾아가는 길은 어려웠다. 길에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상 정상에 돈대가 있다는 말에 의존해서 무턱대고 산을 올랐다. 풀이 우거져서 길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는 길을 개척하며 나아갔다.신비로운 숲의 세계 동검도는 도시인들이 좋아하는 전원주택지라 계속 땅이 개발되고 있다. 도로에서 돈대로 올라가는 길 역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버렸다. 강화도에 오래 산 우리들도 길을 찾기 어려운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할까. 관리 당국의 문화 유적에 대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동검북돈대는 가히 '신비로운 숲의 세계'였다. 돈대 안과 밖에는 나이를 오래 먹었을 나무들이 즐비했다. 소사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하늘을 향해 춤 추고 있었다. 소사나무는 우리나라의 바닷가나 섬에서 잘 자라는 특산종으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의 소사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보호받고 있다.
▲ 동검북돈대 근처에 있는 옛 우물.ⓒ 이승숙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들은 대단했다. 그 중의 한 그루는 더 훌륭했는데, 그냥 보기에도 마니산 참성단의 나무보다 나이도 더 들었을 것 같고 몸치도 더 크고 웅장했다. 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 있었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대접 받을 텐데, 궁벽진 곳에 있어 홀대를 당하는구나. 역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는 걸 나무를 보면서도 느꼈다. 소사나무를 가만히 끌어안고 마음을 나눴다. "이렇게 있어줘서 고마워." 사람의 탐욕만큼 무서운 게 없는데 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는 그 손길을 피해 갔다. 쓸모없는 나무라고 베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냥 두고 봐준 옛 사람들의 너그러운 성정이 고마웠다.숲의 정령들이 지켜주는 동검북돈대 섬 안에 있는 산 정상에 돈대가 있다.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숙식을 하면서 돈대를 지키자면 물을 얻을 수 있는 샘이나 우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근처에는 사람이 사는 집도 없는데, 어디에 가서 먹을 물을 얻었을까. 돈대 근처 어딘가에 샘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려오는데 길 아래쪽에 작은 습지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우물이었다. 둘레에 돌담장을 쌓아놓은 것을 봐서 분명 사람들이 물을 길어먹던 우물이다. 갑자기 동검북돈대가 가깝게 다가왔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이 버려져 있다시피 한 돈대인데, 그런데도 동검북돈대는 방치한 후손들을 꾸짖지 않고 지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애돈대와 택지돈대 그리고 동검도에 있는 동검북돈대까지 한꺼번에 다 둘러봤다. 꽤 무더운 날이었는데도 더운 줄도 몰랐다. 땡볕 아래 걷기도 했고 숲 모기들의 공격에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 모든 애로사항들은 동검북돈대에서 씻은 듯이 다 날아갔다. 숲의 정령들이 지켜주고 있는 듯이 느껴졌던 동검북돈대였다.<후애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129m, 각 변의 넓이 - 32m, 복원 성벽 높이 - 3.5m- 형태 : 정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인천 유형문화재 제33호- 시설 : 문 1개, 포좌 4개, 여장, 누조1개<택지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1081-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103m(추정), 동서 - 30m, 남북 - 21m- 형태 : 장방형(직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동검북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산 70-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261m, 동서 - 93m, 남북 - 38m- 형태 : 장방형(직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 시설 : 문 1개, 건물지(추정) 1기덧붙이는 글
▲ 강화 남쪽 바다를 경계했던 후애돈대ⓒ 문화재청
▲ 성벽과 그 위의 여장까지 다 복원한 후애돈대ⓒ 이승숙 8코스에서는 철새 외에도 또 다른 것도 만날 수 있으니 돈대가 바로 그것이다. 출발지인 초지진의 초지돈대를 비롯해서, 후애돈대, 그리고 도착점인 분오리돈대까지 모두 3개의 돈대가 8코스에 있다. 이 외에도 몇 개의 돈대가 더 있으니 섬암돈대와 택지돈대, 그리고 동검북돈대가 8코스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어 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길 기다린다. 강화도 54개 돈대를 모두 찾아가보기로 하고 지난 2월부터 돈대기행을 하고 있는 우리는 나들길 8코스에 있는 후애돈대와 택지돈대를 보러 갔다. 길상면 선두4리의 어판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후애돈대를 찾아나섰다.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후애돈대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바닷가에 있다. 다른 돈대들이 대부분 바다 쪽으로 튀어 나온 곶(串)이나 구릉의 꼭대기에 있는 것과 달리 후애돈대는 바닷가의 평탄지에 위치해 있다. 돈대가 사방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후애돈대는 그 목적에 일면 상통하지 않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강화 남단의 바닷가는 갯벌이 드넓게 형성되어 있어 침입자가 바다 쪽으로 해서 들어오기에는 불리한 지형이다. 이러한 까닭에 평탄지에 돈대를 축조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돈대와 돈대 사이를 연결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하려는 의도로 양암돈대와 택지돈대 사이에 후애돈대를 축조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후애돈대는 '선두보'의 관할 아래 있었다. 선두보는 강화의 12진보(鎭堡) 중의 하나로 후애돈대, 택지돈대, 양암돈대, 갈곶돈대를 관할하였다. 돈대와 돈대 사이를 연결할 목적으로 쌓았을 후애돈대는 남쪽의 동검북돈대까지 1750보(2.1km), 북쪽의 양암돈대까지는 1450보(1.7km) 떨어져 있다.
▲ 후애돈대 위치도ⓒ 이승숙
▲ 인천유형문화재 제33호인 후애돈대ⓒ 이승숙
▲ 후애돈대 성벽 위 여장 사이로 내다본 강화 앞 바다와 갯벌ⓒ 이승숙 한 변의 길이가 약 32m, 둘레는 129m인 정사각형 모양의 후애돈대는 인천유형문화재 33호이다. 1999년 육군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복원 이전까지 성벽 기단과 여장 일부 그리고 성벽에 오르도록 만들어놓은 계단 일부가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후애돈대는 1995년에 부분 보수를 하였고 1998년에 복원하여 흐터러짐없이 깔끔하고 반듯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벽과 여장까지 다 복원하였으니 원래의 상태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복원한 후애돈대 후애돈대를 둘러보고 택지돈대를 향해 간다. 강화나들길 8코스를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도 택지돈대는 처음이다. 여기 이 언덕에 돈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돈대에 관심을 두자 돈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택지돈대는 동검도가 마주보이는 곶(串)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토축을 기준으로 확인한 결과 동서 30m, 남북 21m, 둘레 103m로 추정되는 네모 모양의 돈대다. 1918년에 작성한 강화도 지형도에는 택지돈대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로 봤을 때 그 당시에 이미 돈대가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육군박물관에서 조사했을 때 토축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땅을 파보면 기단석의 토대가 길게 늘어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 택지돈대는 동검도가 마주보이는 선두리의 바닷가 언덕에 있다.ⓒ 이승숙 후애돈대에서 택지돈대까지 오는 길은 바닷가의 둑길이라 나무가 없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는다. 돈대가 좋아 돈대순례를 하지만 이 땡볕은 피하고 싶다. 그러던 참에 숲이 무성한 언덕이 보였다. 택지돈대가 있는 바로 그 언덕이다.아, 이곳에 돈대가 있을 줄이야... 나들길 8코스는 동검도가 건너다보이는 이 언덕 아래 오솔길을 거쳐간다. 그동안 숱하게 이곳을 지나갔으면서도 돈대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 숲 속 오솔길을 따라가자 나무들에 둘러쌓인 빈 터가 나왔다. 밭으로 이용되었을 법한 크기의 빈 터였다. 돌 무더기들이 좀 있었지만 돈대였을 거라 짐작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단석은 물론이고 성벽 돌처럼 보이는 가공된 돌도 보이지 않았다. 택지돈대의 석재들도 제방을 쌓는데 다 이용되었을까. 둘레가 100m도 넘고 성벽 높이 역시 꽤 되었을 돈대였을 테니 들어간 석재도 많았을 것이다. 5톤 트럭으로 수십 대, 아니 어쩌면 백 대 분량의 돌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그 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 걸까.
▲ 택지돈대는 둘레 103m, 동서 30m, 남북 21m 규모로 추정된다.ⓒ 이승숙 강화의 평야는 대부분 간척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닷가에 둑을 쌓아 갯벌을 육지로 만들었다. 제방을 쌓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했을까. 그럴 때 근처에 있는 폐돈대들의 성벽 돌을 반출해서 사용했을 것이다.택지돈대의 돌들도 역시 그렇게 쓰였을 것이다. 인근에 민가도 없어 사람의 손을 탈 일도 없는데, 그 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겠는가. 바닷가 물막이 공사를 할 때 가져다 썼을 것이다. 숲 모기떼와 조선시대 병사들철저히 파괴되고 훼손된 돈대였다. 군데군데 돌무더기들이 있었지만 별 소용 없을 것 같은 잡석들 뿐이었다. 볼 것도 없는 돈대에 뭐 하러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폐허까지도 돈대가 지닌 역사다. 빈 터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물을 마시며 간식거리들을 풀어놓는데 대부대가 출동했다. 이게 왠 잔치냐는 듯 숲 모기들이 떼로 나타나 사정없이 침을 꽂는다. 아이쿠, 모기한테 당할 자가 누가 있으랴. 우리는 허둥지둥 후퇴했다. 택지돈대에서 번을 서며 바다를 감시하던 조선시대 병사들도 우리처럼 모기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모기를 쫒았을까. 우리처럼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삼 그 옛날 병사들의 고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강화군 길상면 동검도 산 정상에 위치한 동검북돈대ⓒ 이승숙
▲ 동검북돈대는 강화도 54개 돈대 중 가장 크다. 보통 돈대의 3배 크기다.ⓒ 황평우 후애돈대와 택지돈대를 둘러 보았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내친 김에 동검도에 있는 돈대를 보러 나섰다. 코 앞에 동검도를 두고 어찌 그냥 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씩씩하게 동검도로 건너갔다.동검도는 강화도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이라고 했지만 오래 전에 다리가 놓여 강화도와 한 몸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검도(東檢島)는 강화의 동쪽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검문하던 섬이다. 그러니 사실상 동검도에서 부터 강화도가 시작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강화의 동쪽 검문소, 동검도동검도에도 돈대가 있다. 동검북돈대(東檢北墩臺)가 그것이다. 동검북돈대는 강화의 54개 돈대 중 가장 큰 돈대로 일반 돈대의 3배 규모에 달한다. 18세기 이전의 강화를 그린 옛 지도에는 동검북돈대가 돈대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지도에는 봉돈(烽墩) 또는 망대(望臺)로 표기되어 있다. 동검북돈대는 바닷가에 있지 않고 산 정상에 있다. 구형 대포의 사정거리가 바다까지 미치지 못하는 거리다. 돈대가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목적이라면 동검북돈대는 그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 동검북돈대 터에는 이런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다.ⓒ 황평우 돈대의 성벽 돌도 가공이 되지 않은 돌을 일정한 기준 없이 막 쌓은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돈대 성돌이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서 쓴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특징을 볼 때 동검북돈대는 돈대로서의 기능보다는 봉화대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검북돈대 안에는 봉화대도 있는 걸로 봐서 이러한 추정을 할 수 있다. 동검북돈대를 찾아가는 길은 어려웠다. 길에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상 정상에 돈대가 있다는 말에 의존해서 무턱대고 산을 올랐다. 풀이 우거져서 길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는 길을 개척하며 나아갔다.신비로운 숲의 세계 동검도는 도시인들이 좋아하는 전원주택지라 계속 땅이 개발되고 있다. 도로에서 돈대로 올라가는 길 역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버렸다. 강화도에 오래 산 우리들도 길을 찾기 어려운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할까. 관리 당국의 문화 유적에 대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동검북돈대는 가히 '신비로운 숲의 세계'였다. 돈대 안과 밖에는 나이를 오래 먹었을 나무들이 즐비했다. 소사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하늘을 향해 춤 추고 있었다. 소사나무는 우리나라의 바닷가나 섬에서 잘 자라는 특산종으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의 소사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보호받고 있다.
▲ 동검북돈대 근처에 있는 옛 우물.ⓒ 이승숙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들은 대단했다. 그 중의 한 그루는 더 훌륭했는데, 그냥 보기에도 마니산 참성단의 나무보다 나이도 더 들었을 것 같고 몸치도 더 크고 웅장했다. 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 있었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대접 받을 텐데, 궁벽진 곳에 있어 홀대를 당하는구나. 역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는 걸 나무를 보면서도 느꼈다. 소사나무를 가만히 끌어안고 마음을 나눴다. "이렇게 있어줘서 고마워." 사람의 탐욕만큼 무서운 게 없는데 동검북돈대의 소사나무는 그 손길을 피해 갔다. 쓸모없는 나무라고 베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냥 두고 봐준 옛 사람들의 너그러운 성정이 고마웠다.숲의 정령들이 지켜주는 동검북돈대 섬 안에 있는 산 정상에 돈대가 있다.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숙식을 하면서 돈대를 지키자면 물을 얻을 수 있는 샘이나 우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근처에는 사람이 사는 집도 없는데, 어디에 가서 먹을 물을 얻었을까. 돈대 근처 어딘가에 샘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려오는데 길 아래쪽에 작은 습지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우물이었다. 둘레에 돌담장을 쌓아놓은 것을 봐서 분명 사람들이 물을 길어먹던 우물이다. 갑자기 동검북돈대가 가깝게 다가왔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이 버려져 있다시피 한 돈대인데, 그런데도 동검북돈대는 방치한 후손들을 꾸짖지 않고 지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애돈대와 택지돈대 그리고 동검도에 있는 동검북돈대까지 한꺼번에 다 둘러봤다. 꽤 무더운 날이었는데도 더운 줄도 몰랐다. 땡볕 아래 걷기도 했고 숲 모기들의 공격에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 모든 애로사항들은 동검북돈대에서 씻은 듯이 다 날아갔다. 숲의 정령들이 지켜주고 있는 듯이 느껴졌던 동검북돈대였다.<후애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129m, 각 변의 넓이 - 32m, 복원 성벽 높이 - 3.5m- 형태 : 정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인천 유형문화재 제33호- 시설 : 문 1개, 포좌 4개, 여장, 누조1개<택지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1081-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103m(추정), 동서 - 30m, 남북 - 21m- 형태 : 장방형(직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동검북돈대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산 70-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규모 : 둘레 - 261m, 동서 - 93m, 남북 - 38m- 형태 : 장방형(직사각형 모양)- 문화재 지정여부 : 비지정- 시설 : 문 1개, 건물지(추정) 1기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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