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조순 전 경제부총리 빈소 조문…조화·조기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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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란성 작성일22-06-23 23:56 조회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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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유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저녁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조순 전 경제부총리(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윤 대통령은 앞서 조화와 조기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윤 대통령뿐 아니라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등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문재인 전 대통령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등이 조화를 보냈다.고인은 이날 새벽 숙환으로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조 전 경제부총리는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경제학계의 거목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백미(흰 눈썹)로 유명했던 그는 20년간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우리 경제학계의 한 축을 이룬 '조순 학파'를 길러냈다. 정·관계에 몸담았을 때는 청렴한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조 전 경제부총리는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경제학계의 거목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백미(흰 눈썹)로 유명했던 그는 20년간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우리 경제학계의 한 축을 이룬 '조순 학파'를 길러냈다. 정·관계에 몸담았을 때는 청렴한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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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고인은 ‘한국 경제학계의 케인즈’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23일 새벽 3시38분 94살을 일기로 별세한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두고 기획재정부의 한 국장은 20세기 경제학자 중 현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국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비유했다. 한국 경제와 경제학 발전에 남긴 발자국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의미다. 국내 경제 주요 분야엔 조 전 부총리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대한민국 경제가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기본에 충실하며 바르게 갈 수 있는 정책을 늘 고민하셨던 고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추모했다. 경제 관료 출신인 추 부총리는 과거 조 전 부총리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고인을 모실 때 고인께서 보여주셨던 온화하고 인자하셨던 모습, 밝은 미소가 오늘 더욱 그립다”며 안타까워했다.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개인적으로 제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라며 “지금 한국 경제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인이 주신 여러 지혜를 다시 새겨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재정·통화 정책 수장이 모두 조 전 부총리를 거쳤고, 기억한다.고인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중시하며 소신 있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89년 부총리 재직 당시 민간의 토지 소유·이용·개발을 공적으로 규제하는 ‘토지공개념’ 도입을 추진하며 이를 구한말의 근대화 개혁인 ‘갑오경장’에 빗댄 일화가 유명하다. “돈 벌면 땅 사고, 다시 땅 사기 위해 돈을 버는 세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1990년 집권 세력과 재계의 성장 우선론과 갈등하며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나고, 한국은행 총재였던 1992년엔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의 금리 인하 요구에 맞서다 이듬해 사표를 냈다. 지금의 중앙은행 독립성은 고인에게 크게 빚진 셈이다. 조 전 부총리는 2006∼07년 <한겨레>에 연재한 ‘조순 칼럼’을 통해 참여정부를 향해서도 날카롭고 묵직한 비평을 남겼다. 아파트 부동산 투기 억제 등 한 문제에만 ‘올인’하는 한국 경제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참여정부 국정을 주도했던 386세대를 향해서도 “개혁의 초심을 잃었다”고 호통쳤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경계했던 고인의 시각은 지금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인의 생애엔 한국 정치·경제사의 굴곡이 녹아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중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와 경기중학(경기고의 전신)에 편입했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사관학교 영어교수로 선발된 그는 육사 생도였던 전두환·노태우씨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 인연으로 고인은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됐다.1968년부터 공직 입문 전까지 20년간 모교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조순 학파’로 불리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을 가르쳤다. 제자들과 함께 써서 수차례 개정판을 낸 <경제학 원론>은 지금도 토종 경제학 입문서로 읽힌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장에 출마해 ‘포청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이후 민주당 총재, 초대 한나라당 총재, 민주국민당 대표 등을 지냈다. 2000년들어 정치권을 떠난 이후엔 서울대 명예교수 등 사회 원로로서 목소리를 냈다.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울림이 크다. “역대 정부는 성장률과 수출을 극대화하면 나머지 문제는 다 잘 된다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를 잘 낳게 하고, 소년을 가정과 학교에서 잘 가르치고, 청년을 적재적소에 고용하고, 노인을 즐겁게 해주면 경제는 자연히 잘 되는 겁니다.”(2016년 한국재정학회·서울대 경제연구소 분배정의연구센터의 ‘복지와 경제 성장’ 세미나 기조 연설)유족으로 부인 김남희씨, 아들 기송(전 강원랜드 대표)·준·건·승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7시20분. (02)3010-2000.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고인은 ‘한국 경제학계의 케인즈’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23일 새벽 3시38분 94살을 일기로 별세한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두고 기획재정부의 한 국장은 20세기 경제학자 중 현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국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비유했다. 한국 경제와 경제학 발전에 남긴 발자국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의미다. 국내 경제 주요 분야엔 조 전 부총리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대한민국 경제가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기본에 충실하며 바르게 갈 수 있는 정책을 늘 고민하셨던 고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추모했다. 경제 관료 출신인 추 부총리는 과거 조 전 부총리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고인을 모실 때 고인께서 보여주셨던 온화하고 인자하셨던 모습, 밝은 미소가 오늘 더욱 그립다”며 안타까워했다.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개인적으로 제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라며 “지금 한국 경제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인이 주신 여러 지혜를 다시 새겨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재정·통화 정책 수장이 모두 조 전 부총리를 거쳤고, 기억한다.고인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중시하며 소신 있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89년 부총리 재직 당시 민간의 토지 소유·이용·개발을 공적으로 규제하는 ‘토지공개념’ 도입을 추진하며 이를 구한말의 근대화 개혁인 ‘갑오경장’에 빗댄 일화가 유명하다. “돈 벌면 땅 사고, 다시 땅 사기 위해 돈을 버는 세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1990년 집권 세력과 재계의 성장 우선론과 갈등하며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나고, 한국은행 총재였던 1992년엔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의 금리 인하 요구에 맞서다 이듬해 사표를 냈다. 지금의 중앙은행 독립성은 고인에게 크게 빚진 셈이다. 조 전 부총리는 2006∼07년 <한겨레>에 연재한 ‘조순 칼럼’을 통해 참여정부를 향해서도 날카롭고 묵직한 비평을 남겼다. 아파트 부동산 투기 억제 등 한 문제에만 ‘올인’하는 한국 경제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참여정부 국정을 주도했던 386세대를 향해서도 “개혁의 초심을 잃었다”고 호통쳤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경계했던 고인의 시각은 지금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인의 생애엔 한국 정치·경제사의 굴곡이 녹아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중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와 경기중학(경기고의 전신)에 편입했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사관학교 영어교수로 선발된 그는 육사 생도였던 전두환·노태우씨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 인연으로 고인은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됐다.1968년부터 공직 입문 전까지 20년간 모교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조순 학파’로 불리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을 가르쳤다. 제자들과 함께 써서 수차례 개정판을 낸 <경제학 원론>은 지금도 토종 경제학 입문서로 읽힌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장에 출마해 ‘포청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이후 민주당 총재, 초대 한나라당 총재, 민주국민당 대표 등을 지냈다. 2000년들어 정치권을 떠난 이후엔 서울대 명예교수 등 사회 원로로서 목소리를 냈다.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울림이 크다. “역대 정부는 성장률과 수출을 극대화하면 나머지 문제는 다 잘 된다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를 잘 낳게 하고, 소년을 가정과 학교에서 잘 가르치고, 청년을 적재적소에 고용하고, 노인을 즐겁게 해주면 경제는 자연히 잘 되는 겁니다.”(2016년 한국재정학회·서울대 경제연구소 분배정의연구센터의 ‘복지와 경제 성장’ 세미나 기조 연설)유족으로 부인 김남희씨, 아들 기송(전 강원랜드 대표)·준·건·승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7시20분. (02)30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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